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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문] 새로운 것에 대한 대중 욕구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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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0-10-27 04:04 조회1,3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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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에 대한 대중 욕구 반영
'일시적 유행 따르기 아닌 창조적 노력 필요'

'짬뽕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자장면이냐.' 세상에 이보다 더한 갈등이 있을까. 하지만 한국의 중화반점은 이를 단숨에 해결하고 말았다. 짬뽕과 자장면의 경계를 무너뜨린 이름 하여 '짬자면'을 새로운 상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문화의 경계가 무너진 것도 이와 같다. 수용자들의 요구, 혹은 소비자들의 호주머니를 겨냥한 결과다. 드라마 <궁>에서 윤은혜가 입궐한 후에 입은 옷들은 전통과 현대적인 느낌을 적절히 배합한 화려한 볼거리가 관건이다. 영화 <은행나무침대>는 멜로와 판타지를 통합하여 제작되었고, 연극과 영화의 크로스오버인 영화 <왕의 남자>는 초점이나 표현방식은 다르지만 연극 <이(爾)>와 주제가 동일하다. 케이지(John Cage)의 주요작품은 고전과 대중적인 스타일이 혼합되어 만들어졌고, 동서양의 공간을 초월한 뉴 에이지 음악은 이제 엄연한 하나의 음악장르로 자리 잡았다.

포스트모더니즘 이전 시대에는 지금과 달랐다. 사실에 대한 부풀림이나 무미건조함, 좋은 부분만을 주류로 인정했다. 어렵고 복잡한 읽기와 듣기, 그리고 보기능력을 전수 받길 원했다.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 문화적 접촉이 없었고, 문화에 대한 지적인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이런 문화 환경이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은 사회의 다변화와 함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부터다. 대중은 전단지와 스트립쇼, B급 영화와 심야토크쇼, 역 대합실에서 파는 괴기소설과 로맨스, 공상과학소설 또는 환타지 소설에 매혹 당하기 시작했다. 엘리트주의에 혹하지 않았고, 그들의 텍스트를 인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경계의 종류에는 눈에 보이는 지역적이고 국가적인 경계뿐 아니라 정신 안에 존재하는 인식론적인 경계가 있다. 하지만 문화적 관점에서 비추어본다면 둘 모두를 대입해도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속담처럼 문화는 온전히 하나의 것으로만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에 우리가 창조물이라고 믿는 것들 중에는 고대로부터 존재하는 원형을 다른 것과 결합시키거나 재생산한 것이 대부분이다. 각 분야의 경계를 서로 넘나들며 전혀 새로운 것으로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문화는 새로운 것이다’라고 믿는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려는 인간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고유한 것에서 벗어난 새로운 것들에 쉽게 익숙해지는 탓도 크다.

1800년대 초, 민주주의와 대중교육이 상류층의 문화독점을 무너뜨리기 이전에는 대중의 문화적 수요가 극히 미미했다. 문화는 귀족이나 지식인과 같은 특수계층의 전유물이었다. 버릴 것이라고는 돈과 시간뿐이라는 이들이 수용자의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문화를 선택하지 않았다. 경험하려는 의지가 부족했고 왕이나 국가가 문화선택의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흡족해했다. 극장과 같은 문화적 요소들이 대중의 거대자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대중들과의 문화접촉을 꺼렸을 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대중의 문화는 달랐다. 절실한 것이었고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대중의 존재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계층에 대한 복수였다. 덧붙여 대중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기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새롭게 각성된 대중의 문화적 수요가 이윤이 높은 상품시장이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상품시장을 위해 서적, 정기간행물, 그림, 음악, 그리고 가구들을 대량으로 저렴하게 생산했다. 또한 문화의 대량생산과 대량분배에 특히 적절한 영화와 TV등의 새로운 미디어를 탄생시켰다. 

최근에 문화의 경계 허물기가 가속화되는 이유는 새로움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기존의 경계를 허물고 재배치하는 등의 변화만으로도 창조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원칙이 있어야한다. 경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새로움이라고 보기 어렵다. 경계를 넘나드는 다변화된 주체로서의 미학적 판단이 분명해야한다. 단순히 유행에 영합하여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무경계는 장르도 아니고 창조는 더욱 아니다. 

짬자면이 일시적인 흐름을 주도했지만 곧 시들해진 건 절반씩 정확하게 나누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창조적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경계를 단순히 무너뜨리는 것만으로는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끝없는 창조가 따라야 한다. 짬자면과 같은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한상덕 문화 칼럼니스트· 대경대학 공연예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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